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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td

런던으로 이사 온 지도 한 달이 넘었고 학교 버스 대신 이제 이곳의 지하철, 튜브를 타는 게 낯설지 않다. 매번 나보다 일찍 도착하는 튜브를 향해 마음이나마 보내는 일도 (어차피 금방 또 와서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달려가지 않는다) 그저 짤막한 일과 중 하나가 된, 무심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튜브 대기 시간은 길어봤자 3~4분 정도인 것 같다. 그리 잘 되어 있는 우리나라 지하철보다도 텀이 짧아 거의 모든 날을 에스컬레이터 내려오자마자 타곤 했는데 오늘은 타이밍이 잘 안 맞았는지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었다. 그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오늘의 나’가 안전도어 거울을 통해서 보였다. 늘 고민하지만 결국 또 입게 되는, 그래서 삼 일째 입게 된 ZARA 청바지, 거기에 추울까 봐 챙긴 가장 만만한 TOMMY HILFIGER 셔츠. 룩만 보면 오늘의 나는 영락없는 청춘의 모습인데, 문득 그 모습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서른넷의 모습이라 어색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잘 어울려서 피식 웃음이 났다. 잠시였지만 지난 옛날, 이상향(?)의 룩을 꿈꿨던 내가 떠오르면서 말이다.

아마 대학생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막연히 27살이면 회사가 준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사내 식당에서 H라인 미디스커트를 입은 채 밥을 먹는 상상을 간혹 하곤 했었다. 스물일곱이라고 특정한 이유는 뭔가 그 나이가 어른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2~3년이 지나 진짜 직장인으로서 구색을 갖춘 나이랄까. 나름 체계적으로 계산했던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얼토당토않은 룩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상향의 룩을 완성하고자 그 나이 즈음 H라인 미디스커트를 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스커트가 얼마나 입기 까탈스럽냐면, 일단 허리부터 힙 라인까지 쫙 달라붙어서 배에 계속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이 스커트를 입은 날에는 그 작은 공깃밥 한 그릇을 클리어하는 일도 버겁다. 또한 종아리에 온갖 시선이 집중되는 걸 받아낼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신감으로 차 있기보다는 알로 꽉 찬 종아리이기도 하고. 걸어 다니는 것도 성큼성큼 다니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젓가락질 마냥 춍춍춍 걸어 다녀야 한다. 내가 꿈꾸던 이상향의 *Ootd는 이렇게 현실적인 못난 이유로 그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벌써 7년도 더 된 옷이라 어딨는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내가 꿈꾸던 나의 스물일곱은 H라인 미디스커트만큼이나 동떨어진 모습이긴 했다. 이제껏 사내 식당이 있는 회사에 다녀본 적도 없고, 사원증 역시 목에 걸어 본 적도 없다.

H라인 미디스커트를 입는 게 꿈이었던 27살을 넘어 34살이라는,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의 간극을 지금 막 들어오는 튜브의 굉음이 깨뜨리며 다시금 청바지에 남색 셔츠를 대충 둘러 맨 내가 보였다. 스물일곱에서 7년이나 더 더해진 시간 속에 나의 모습은, 모습만은 이렇게 대학생일 수 없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내가, 상상해본 적도 없는 런던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1년 전에 나의 막돼먹은 상상이 다시 떠올랐다. 1년 후, 그러니까 딱 지금쯤 논문을 호기롭게 다 마무리 짓고 나를 향한 뿌듯함을 막연하게나마 즐기고 있는 모습 말이다. 논문 드래프트 제출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반은커녕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 마주한 지금, 1년 전에도 나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늘 절에 갈 때마다 부처님께 시주하며 내가 꿈꾸는 바를 빌곤 했는데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이로써 7년 전이나, 1년 전이나 그리고 절에 갈 때나(!) 내가 꿈꾸는 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정설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꿈꾸지 않는 자 미래가 없다느니, 희망이 없다느니 이런 소리는 이제 거둬들일 때가 된 것 같다.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야 하오.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도대체 누가 미친 거요?”라며 자신을 조롱하던 사람들에게 돈키호테가 외친 말이다. 그러나 그저 막연하게 공허한 꿈만 꿔온 나로선 꿈꾸지 않는 자보다 내가 더 낫다고 말할 처지도 되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예기치 않는 일들로 늘 가득 차 있지 않나?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스크를 낀 채 튜브에 앉아 제대로 터지지 않는 인터넷을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것처럼. 혹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논문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할 것 같은 내 변명이 아무 죄 없는, 무고한 내 상상을 핑계로 이리 길어진 것일지도. *Ootd: 'Outfif of the day' 즉 오늘의 패션, 오늘의 착장이라는 뜻.

에디터 양열매 👉 온오프라인 미디어를 운영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한다. 독립잡지 라인 매거진 발행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영국에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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