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근을 준비하면서 아끼던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작년에 산 청바지로, 굵은 허벅지를 무난하게 가려주는 통바지다. 노트북 가방에 핸드폰, 아, 이어폰도 챙겨야지 하면서 무릎을 구부리는 찰나. 부우우욱-. 소리가 났다. 탱탱한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날실과 홑실이 이윽고 이리저리 가로질러 갈라터지는, 그 파열음 말이다.
사타구니 부분에 휑한 터널이 생긴 청바지를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더이상 코로나를 핑계로 먹고 눕지 말라’는 신의 매우 구체적인 메시지란 해석도 했다. (그래야지만, 충격이 덜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대체로 긍정적인 축에 속한다. 과체중으로 옷을 찢어 먹은 것은 사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후론 처음 있는 일이다. 쉬는 시간, 친구들과 크게 웃다 ‘투욱’하는, 교복 치마 허리춤의 개방감을 느낀 뒤로 40대 중반에 겪은 색다른 개방감이니 아주 나쁜(?) 기억만은 아니다.)

출근해 일을 하던 중,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둘째가 문자를 보내왔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간다는 내용이다. (코로나 때문에 초등 3학년생은 일주일에 단 사흘을 학교에 간다. 이글 퇴고시점엔 확진자 수가 1300명을 넘어 또 다시 온라인 수업 신세가 됐다) 내 딴엔 아침에 발생한 사건을 아이에게 ‘함께 웃자’는 취지로 문자로 전했다. 분명히 ‘크크크’가 오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도착한 답은 전혀 다른 세글자. ‘오똑해’.
귀여움 충만한 답이라고 할 분도 있겠으나, 적잖은 충격이었다. 일단 맞춤법이다. 빠르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이랬다.
‘우리 애도 엄마가 살찐걸 아는구나. 아, 근데, 이건 뭔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맞춤법도 틀리는구나. 얘는 한글이 안 되는구나. 이런 애한테 내가 무슨 공부를 가르치겠다고. 나는 지난 일년 반 남짓한 시간을 아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구나. 내년이면 4학년인데. 얘만 이렇게 뒤쳐진 건가. 아 내탓이다.’
요지인즉슨, 숨어 있던 부모 두뇌 회로가 풀가동하면서 웃어야 할 이야기가 진지한 다큐로 급전환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코로나 부모
웃자고 한 이야기는 점점 많은 사념 속으로 나를 몰아갔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도 ‘견과류가 뭐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수학문제집을 풀다가 벌어진 일인데, 문제는 이랬다.
“땅콩이 10개가 있습니다. 아몬드는 45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땅콩과 아몬드 도합 17개를 먹으면 견과류는 모두 몇 개가 남을까요.”
또 있다. 단원평가 시험을 봤다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맑고 밝은 표정으로 자랑을 했다. “엄마, 나 이번에도 다섯개 밖에 안틀렸어.”
힌트는 도처에 있었다. 부모의 시선에서 불안감을 느낄만한 대화들이 많았으나, 나는 마감을 위해 노트북 앞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아이 대신 초등학교를 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공부를 시킨다고 아이의 한글실력이 늘어날까. 산수를 못해도, 받아쓰기 백점을 맞지 못했어도 나는 어른이 됐다. 좋은 어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심지어 밥벌이도 하고 있다. (회사에 무한한 감사를!)
옆집 아이라면 ‘어머, 요즘 애들 다 그래요. 호호호’ 하고 귀엽게 웃어 넘기겠지만, 내 아이 일이라 불안 수치가 올라간다. 어쩌면 좋을까. 일단 할 수 없는 것부터 제거를 해볼까.
1.대신 학교를 다닌다. 2. 대신 곱셈 나눗셈, 맞춤법을 공부한다. 3. 퇴근을 일찍해 문제집 풀이를 한다. 4. 먹을 비용 등 지출을 줄여 학원을 보내거나, 과외 선생님을 붙인다. 5. 문제집을 사주고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입시킨다. 6. 너의 인생은 너의 것, 미래는 너의 책임이니 알아서 하라고 한다. 7. 차라리 돈을 많이 벌어 물려줄 요량으로 재테크에 올인한다.
하나마나한 것들을 제끼며 생각해보니, 이 문제를 해결할 에너지는 결국 나에게 있어야만 한다. 왜 모든 것이 기승전 엄마냐는 타박도 있겠지만, 부모에게 그 에너지가 있어야 한단 의미다. 말하자면 ‘하면 되지!’ 같은 씩씩한 에너지를 맘 속에 저장하고 있다면, 맘 속 불안감의 회오리에서 적어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어떤 일이 벌어지던 ‘하면 되지’란 맘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꽤 잘 살고 있단 신호일 거다. 그러니 혹여, 아이를 키우다 덜컥 불안감에 빠졌다면 아직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오똑해’로 분투 중인 이웃 김똑같을 기억해달라.
👉 김똑같은
일간지 기자로 살고 있다. 벌써 17년째다. 최근엔 ‘부모’라는 카테고리에 빠져있다. 지난 봄, 회사에서 ‘부모독자’를 대상으로 한 뉴스 서비스를 해보라는 이야기에 망연자실했다. “제가 제일 못하는 게 부모노릇이라고요!”라고 항변해봤지만 “그러니까, 이 참에 배워!”라는 높으신 분의 말에 수긍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페어런팅(parenting)이라는 새 뉴스 서비스를 앞두고 있다. 신의 가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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