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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캐스팅

퐁당 에디터

최종 수정일: 2021년 5월 10일

4월 30일이 되면 5월 1일 메이데이, 노동절이 될 때까지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았다. 그러고는 다음날 이유를 만들어 시위를 했다. 물러가라, 타도하자.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모 대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연단 위에 문성근 아저씨가 연사로 올라왔다. 여러 연사들이 올라와 구호를 외치면 청중들은 ‘투쟁!’하고 추임새를 넣는 분위기였는데, 유독 문성근 아저씨가 한 바탕 구호를 외치고 나니 다들 와~~하고 박수를 쳤다.



문성근 아저씨가 다시 한번 구호를 외쳤지만, 청중들은 또 와아아~하고 박수만 쳤다. 당시 우리 눈에 문성근 아저씨는 ‘그것이 알고 싶다’ MC로 활동하는 연예인이었으니까. 문성근 아저씨도 팔뚝질 하다 말고, 머쓱해서 그냥 배꼽 인사를 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팔뚝질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분노와 시대의 정의를 품고 있다 해도 문성근 아저씨를 연예인, 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나 생각할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은 이데올로기보다 쎄다.


5월 1일이 되자 나도 무리를 따라서 시위에 참가했다. 보통은 사삼공 축제만 보고 놀다가 노동절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는데, 시위 현장이 너어무 집 앞이라 도저히 핑계를 만들 수가 없었다. 시위 대오가 문 앞에 버티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간단한 임무도 맡았다. 집에 물정 모르는 동아리 새내기들을 재웠다가 아침에 깨워서 이들을 데리고 시위에 합류했다. 아무려나. 너어무 재미가, 지루하고 피곤했다.



눈치를 살피다가 대오를 이탈해, 볼은 빨갛고 시내 지리도 잘 모르는 새내기들을 꼬셔서 PC방으로 도망갔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들에게 스타크래프트 유니버스를 설명하고, 각자의 캐릭터에 맞는 종족을 지정해주고, 각 종족들에 얽힌 시나리오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날이 어둑어둑 해질 때까지 게임을 했던 것 같다. 스타크래프트는 이데올로기보다 한참 쎄다.



결국 욕을 된통 먹었다. 혼자 빠져나갈 것이지, 시위 대오에 커다란 땜통을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다들 한 마디씩 비난했다. 염치가 없다, 부끄럽다, 지삐 몰라(부산 방언: 자기 밖에 몰라), 실망했어요. 그때는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았는데, 먼 훗날 첫 시위부터 게임의 참맛을 알게 된 그 후배 가운데 하나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 도중 PC방에서 한참 스타크래프트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제서야 좀 미안했다.



총 파업 현장에서 춤추는 크레용팝처럼, 국가보안법 철폐 시위대에 잘못 섞여 들어간 스타크래프트 헤비 유저처럼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낯설고 어색할 때가 많다. 한참 샐러리맨으로 일할 때 특히 증상이 심했다. 미친듯이 일해서 마침내 상당한 규모의 국가 사업을 따낸 적이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들 기뻐 날뛰고 축하 인사를 건네도 정작 나는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 평범한 기쁨이 결국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넥타이 매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할 자신도 없고.


내 것이 될 수 없는 기쁨, 공감할 수 없는 괴로움. 내가 잘못 초대된 사람 같고, 미스캐스팅된 배우 같고. 누가 캐스팅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일에 잘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나오거나, 국물만 나오면 엎지르고, 묻는 질문에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어제는 운동을 끝내고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잘 생긴 외국인 청년이 나의 손목 시계 종류를 묻고, 어디서 살 수 있냐고 그래 가지고.


더듬더듬 짧은 영어 실력으로 자랑도 하고, 숍 위치도 가르쳐 주면서 심지어 막 싼 거라고 한참 겸손을 떨었는데,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통화 중이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급히 자리를 피했는데 남의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다시 돌아가서 내 운동화를 찾아 신어야 했는데, 내 운동화는 사물함에 넣어놨다는 기억이 그제서야 났다. 하지만 내가 몇 번 사물함에 운동화를 넣어 놨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고.


아직도 사는 일에 적응이 안된다. 어색하다.



에디터 김선형

👉 온오프라인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한다. 아직 적응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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