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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의 으르니

퐁당 에디터

지금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만큼 책을 많이 읽었던 때가 없었다. 지금은 그냥 소장용으로 사는 행위에 그치고 있는데, 마치 내가 아닌 내 돈이 책을 읽고 있는 것과 같달까. 어쨌든 그 정도로 책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심지어 초등학교, 중학교 때가 내 생애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때로 기억되는데, 진짜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길가면서도 책을 읽어서 엄마한테 대차게 혼난 적도 있다. 정말 꼴사나운 모습이긴 하다. 이렇게 꼴사나웠던 내가 빠져있던 책은 엄마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는, 총 24권인가 12권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나라 역사만화책과 위인전 풀세트였다.

그중 위인전은 세종대왕, 신사임당 등 초등학생 지식으로도 익히 알 만한 인물들은 물론이고 처음 듣는 인물들도 꽤 많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김활란이었다. 내가 위인전에 쓰여 있는 김활란의 업적에 얼마나 감화되었는지 (이제는 그녀의 ‘조작된’ 업적이 무엇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문득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볼까 싶었지만 찾아보고 싶지도 않다) 당시 벅찼던 감정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진 여성이 있다니, 이렇게 공부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이 있다니! 초등학생의 눈에는 김활란은 빛이었고, 나아갈 길이었다. 나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김활란이라고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그녀에 빠져 있었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이 믿음이 와장창 무너진 건 중학교 때 우연히 도서관 역사 코너에서 찾은 친일반역자와 관련된 책이었다. 역사 만화 풀세트를 열 댓 번도 더 읽었기에 이제 한발 더 나아가볼까,하는 생각에 아주 두꺼운 역사서 쪽에 기웃대다가 우연히 뽑아 든 책에서 김활란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며 이 파국은 시작된다. 알고 보니 그녀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할 대표 여성민족반역자였던 걸 그때 알았는데, 어린 나이에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여겼던 이가 일본 앞잡이 중의 앞잡이였다는 사실에 세상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지껄이고 다닌 말들과 위인전 속 그녀를 믿었던 나의 모습이 하찮아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런 조작된 글을 쓴 작가와 출판사에 분노가 치밀었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믿을 게 하나 없다는 큰 교훈을 깨우쳐 준 계기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단 한 번도 누구를 존경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고, 존경해본 적도 없다. 이 충격은 꽤 오래 갔는데,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게 있는가, 라는 질문을 계속 되뇌며 한창 사춘기 시절 김활란까지 더해져 내 혼돈의 카오스 중 하나였다. 그때의 상처(?)라고 하면 오버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사람은 내가 겪어보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공고히 생겼고, 이러한 조작된 진실을 늘 경계하는 자세를 견지해야겠다는 걸 어린 나이에 비장하게 다짐했었다. 나만 해도 나의 착한 모습과 나만이 알고 있는 못돼 먹은 모습이 함께 공존하며 하나의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감히 내가 어떻게 타인을 존경하니 마니로 나눌 수 있을까. 모두는 다층적인 모습을 포함하고 있기에 내가 그 사람을 뼛속까지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표현을 쉽게 쓸 수 있지 않음을 어린 나이에 김활란을 계기로 배운 것 같긴 하다. 그 후로 그저 내가 믿는 건 ‘끼리끼리는 사이언스’ 이 정도다.

그래서 좋은 사람, 좋은 어른, ‘존경할만한’이라는 표현을 쓴 기사 타이틀이나 멘트를 읽었을 때 무척 낯뜨거워지며 그런 멘트가 쓰여 있다 싶으면 그 기사는 거의 스킵행이다. 매거진이나 신문의 경우에는 바로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인터넷은 바로 백페이지 버튼으로 돌아간다. 일단 자기가 자기 입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가면서까지 어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자기가 좋지 않았길래 이렇게까지 반박하고 싶어 하나, 생각이 들어 적어도 나에겐 매력이 없다. 더는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걸 똑같이 받아 적거나 기자 딴에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건 그만큼 이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없다거나,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고. 오히려 이런 단어들은 아무 맥락 없이 편하게, 만만하게 쓰이기 쉬운 말이니까. 아니, 기사도 건너뛰는 마당에 실제로 자신을 ‘좋은 어른’으로 칭하는 워딩을 실 사운드로 듣고야 말았다. 내가 느낀 첫 마음은 신박함이었다. 실제로 기사 같은 데에서는 그렇게 쓰여 있는 걸 꽤 본 적은 있는데 (분명 나도 쓸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워딩을 썼다에 한표다), 청각적으로 자기 자신을 그런 워딩으로 일컫는 걸 실제 듣는 건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새로웠다. 진심으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는 그 당당함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내 그 신박한 감정은 중딩시절 혼돈의 카오스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한 워딩이 절대 좋은 의미로 쓰일 수 없는 ‘좋은’과 설상가상 그 뒤에 오는 단어가 ‘어른’이라니. ‘어른’은 ‘좋은’보다 훨씬 더 입에 올리기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텅 빈 무게감에 말을 잃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예전 퐁당에도 썼는데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면 내가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에게 어른의 정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던 듯하다. 그런 어리숙한 생각을 뒤로하고 더 이상 나는 어른을 꿈꾸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그 누군가가 나의 ‘어른’이 돼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떡국 좀 남들보다 많이 먹었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그릇이 커지는 것도 아니기에 어른은 절대 나이로 가늠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일단 그 지점부터 어그러졌다. 자신이 남보다 나이가 많다고 자기 스스로 어른으로 칭하는 것. 정말 어른이라면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앞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든 존중하는 마인드로 대하는 자세, 그게 먼저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타인의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만으로는 절대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아참,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아는 ‘좋은 어른’은 스스로 ‘으른으른’하지 않는다는 거. 상하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 그저 편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화상 목소리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그런 사람들. 여기서 어른이고 뭐고 그게 뭐가 중한디? 그런 거 보면 요즘 시대 어른도 힘이 들 것 같긴 하다. 꼰대를 피해 ‘좋은 어른’이 되야 한다는 우리시대의 프레임이 ‘그냥 어른’ 여럿 망쳤다.



👉 에디터 양열매 에디터. 기자. 칼럼니스트. 독립잡지 라인 매거진 편집장. 영국에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고 돌아와 일자리를 구해야 ... 하나? 꼭 그래야만 할까, 고민하고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일자리를 구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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