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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더불어

퐁당 에디터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 번지는 다솜, /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 번지고 있다 /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 너무 멀리 /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 다솜은 옛말이지만 /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 축축한 옛말이지만

- 유종인 시 ‘이끼와 더불어’ 가운데

*다솜: ‘사랑함’의 옛말


이끼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대략 2019년부터 특별히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평소라면 지나쳤겠지만 자주 다니던 숲과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이끼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어느새 이끼는 내 눈길을 끌고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 자주 보이는 이끼들은 우리가 '이끼'하면 떠오르는 초록색의 둥그런 것인데 부드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린 이후로는 이끼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달까. 물론 '식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형태, 그러니까 잎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 있는 것들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끼는 뭔가 달랐다. 이끼는 이끼를 제외한 다른 식물에서 볼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시각, 촉각적으로 둥글둥글하고 보슬보슬하면서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는 이보다 완벽하게 들어맞는 식물에 이끼가 제격이었다.



나는 자연 속을 거니는 것을 좋아해 나무와 풀이 많은 곳을 즐기는데 이끼를 좋아한 이후로는 돌이 많거나 습한 곳을 찾아 가는 경우가 늘었다. 그래서 어느새 오름보다 곶자왈과 숲길을 더 자주 찾게 됐다. 특히 비가 온 다음 날에 걷게 되면 이끼들이 평소보다 활기를 더 띄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설렌 마음을 품고 걸으러 간다. 습기를 머금고 있는 이끼는 건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는 모두를 반겨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끼를 살짝 만져볼 때의 충만감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굳이 표현하자면 빛 속에서 반짝이는 이끼들이 다같이 입을 모아 따듯한 목소리로 나를 환영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좋아하게 된 이끼를 집에서도 볼 수 있게 된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끼를 사기 위해서는 식물을 파는 곳으로 가면 되겠단 생각에 일단 발이 닿는 꽃집을 몇 군데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섯 군데를 방문했다. 그 중 두 군데는 이끼는 있지만 살아있는 것은 없고 모조 이끼는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초록빛을 띈 이끼 모양의 플라스틱이었다. 전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번 아쉬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그러다가 J중·고등학교 정류장 앞에 있는 I농원을 떠올렸다.

타지 사람인 나는 연고자 한 명 없는 낯선 제주 땅에서 무척 외로움을 탔는데, 식물을 키우면 팍팍하게 건조해진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본가도 아닌 곳에서 식물을 책임지는 일은 내게 어느정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부담없이 키울 수 있는 것을 찾아보니 수염 틸란드시아는 짐을 싸고 본가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식물의 상태가 크게 상하지 않을 것 같아 한 번 사보자! 맘을 먹었고, 그걸 사러 간 곳이 I농원이었다. 나에게 나름 이야기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기대를 품고 방문했으나 아쉽게 이곳에도 이끼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J중·고등학교 쪽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W농원으로 갔다. 이곳은 여러 가지 종류의 토분이 눈에 띄는 화원으로, 전에 들렸던 농원보다 넓이가 커 식물의 가지 수가 더 많다. 들어갔더니 직원분이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끼를 사러 왔는데 있냐고 묻자 직원은 아, 하시더니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뒤를 쫓아 걸어가자 저번에 뵈었던 사장님이 작업을 하고 계셨다. 다시 봐도 신기한 이곳의 다양한 틸란드시아들을 보다가 이끼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파는 건 없는데... 하시면서 하우스 밖으로 나가셨다. 따라 가보니 자그마한 화분 몇 개에 팔이 기다란 이끼들이 자라고 있었다. 사장님이 '깃털이끼'라고 이름을 알려주시면서 따로 파는 것이 아니니 그냥 준다고 하셨고 나는 감사한 마음에 저번에 왔을 때 눈에 담아두었던 토분을 구입했다. 사장님은 다시 하우스로 들어가면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끼는 왜 사는 거에요?"



생각을 고른 뒤 예쁘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그 다음 사장님의 말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끼를 조심히 메고 있던 백팩 안에 넣고 혹시라도 화분이 가방 안에서 뒤집히지 않을까 신경쓰며 다음 일정 장소를 향해 걸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 날 이후 나는 총 4개의 이끼 화분을 기르고 있다. 이제는 집안 사정으로 본가를 제주로 옮기게 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화분들이 자리를 차지할지에 관한 생각들 때문에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아무리 예뻐도 내가 잘 공간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후로 관련 sns 계정도 만들고, 행사도 찾아 가면서 관련 도감과 도서도 샀다. 이끼를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앞서 말한 도서로 스터디도 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종강 후에는 각자의 일정으로 어느새 흐지부지 됐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보니 이끼를 향한 나의 애정이 생각보다 맹맹한 수준이라 느꼈다. 대상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보통 어떤 대상에 특별한 관심이 생기면 그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싶어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향후 10년 15년 뒤에도 이끼를 키우고 있다면 이끼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저 맹맹하고 애매한 정도일까? 분명한 건 요즘은 아까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단호하다 못 해 되묻는 대답을 한다. 이끼 너무 예쁘지 않나요?

이끼 애호가 김준영 👉 이끼를 보살피고, 기르는 일을 좋아한다. 이끼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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