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에 ADHD와 우울증을 한꺼번에 발견한 나는 반미치광이로 퇴행하고 있었다. 안 미친 반쪽으론 둘째딸, 회사원, 여자친구 같은 역할을 연기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광증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정신병의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듯 참담했다. 매일매일 출근하거나 놀러 다니면서도 내 안의 감옥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공사다망했으나 그 이상 허망하여 누굴 만나든 스친 것조차 아니었다. 끝나지 않았기에 나는 절망의 중량을 몰랐다. 부피도, 농도도, 깊이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내가 망할 것임을 알았다. 나는 스스로의 실패를 예언할 때에만 동물적으로 용맹했다. 나머지 순간엔? 정물이 된 것처럼 멍했다.
망할 거라 예상하고 실제로 몇 년을 망쳤으므로…… 나는 내 운명을 다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 치 앞을 모르는 불안에 갈려 소금이 되도록 울곤 했다. 퉁퉁 부은 아침에 약을 먹으면 기프티콘 같은 정열이 살아났다. 그리고 밤에 다 죽었다. 아무래도 기프티콘이니까, 용량만큼의 희망을 교환한 후엔 가치를 잃는 모양이었다.
나의 열망은 굴절된 좌절일 뿐인데도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 똑똑해지는 꿈, 특별해지는 꿈, 온전해지는 꿈. 그런 내 모습은 꿈에서만 가능하다는 불신이 제거된 꿈, 박수갈채를 받는 꿈, 박수갈채가 내 것임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꿈. 꿈으로 시작해 꿈으로만 끝나는 거짓들을 주워 담으며 살았다. ADHD만 아니면 모든 꿈이 현실이리란 환상통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 느낀 건, 이렇게 생각이 많은데도 생각만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실현력이 없는 나의 꿈들은 미래가 아니었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그저 영원히 갈 수 없는 어느 지점이었다. 그래도 꿈에게 빚을 지듯 희망을 추출할 순 있었다. 가축이나 식물에게 그러하듯이, 내 자신에게 일종의 품종 개량을 시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내 속의 열성 ADHD 인자들을 제거하고 최고급의 나로 우뚝 선다면 현대 개량종들이 누리는 평가들도 전부 내 것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편리하게 경영되기 위해, 병충해에 강해지기 위해, 금전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스스로의 토종적 기질을 전부 누르기 시작했다. 본래 나는 과격했다. 그래서 순종적으로 굴었다. 드세려는 본능이 나올 때마다 “순종적인 사람들은 너처럼 하지 않아. 네가 하고 싶은 것의 반대가 순종이야.” 되뇌었다. 나는 사회생활에 도움 안되는 식으로 호불호가 강했는데, 그런 표현도 전부 금지되었다. “싫다고 하지 마. 좋다고 하지 마. 싫은 걸 잘 참아냈다고 자랑도 하지 말고, 네가 실은 뭘 좋아하는지 말하지도 마.” 입도 떼기 전부터 입 열려는 시도 자체로 비난받기 일쑤였다. 나는 욕도 많이 했는데, 이 습관을 고치진 못했지만 욕할 때마다 나 자신의 지독한 검열을 받았다. “또 그런 말씨를 쓰다니, 너는 세상에서 가장 상스러워. 그러니까 하필 ADHD지……”
사그라드는 검열은 없으므로 사이코 같은 나레이션은 금세 인간관계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남자친구한테 사과해. 네가 이기적으로 굴었잖아? 너는 어떻게 잘해보려고 해도 이기적이냐?” “ADHD 가지고 세상 끝난 것처럼 굴지 마. 너 하나 징징댄다고 이 커다랗고 위대한 세상이 바뀌진 않아.” “친구들한테 잘 좀 못 해? 애들이 너랑 놀아주느라 얼마나 힘들겠냐고.”
“슬프다고 생각하지 마, 기쁘다고 우쭐하지 마.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제발 하지 마.”
이것들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내가 제정신을 팽개치고 내면적 보이스에 피싱 당한 이유는, 이런 방식이 실제로 외부와의 갈등을 줄여주기 때문이었다. 등신 역할을 자초하던 시절 난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누구 말에도 반대하지 않으며 평판의 황금기를 누렸다. 평판이 황금 낱알로 보여서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으며 갈구하던 시절이었다. 오로지 평판으로만 ADHD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듯이, 평판이 ADHD 치료 효과의 척도라도 된다는 듯이. 집착적 온화함으로 다신 안 볼 사람들에게도 공을 들였다. 스스로를 공공재로 만드는 일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난 실제로 착했다. 어리고 어리석어서 지나치게 순진했다. 그러나 큰 착각은 약한 것이 악한 것보다 이롭다는 생각이었다. 악할 수도 있는 인간이 약하기를 선택하면, 세상 모두가 내 본성을 참작해주리란 낙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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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천천히 그러나 나쁘게 튀었다. 내 감정을 억압하며 모든 타인을 긍정하자, 나를 만만히 여기는 사람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나를 누군가 함부로 대하리란 생각을 못했다.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생의 추상적 진리를 믿기 때문이었다. 노력하는 자에게 영광이! 노력만을 믿느라 노력에도 종류가 많고, 어떤 노력은 틀린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고려하지 못했다.
착각의 대가로 인생 최악의 착취자들을 연달아 만났다. 나쁜 사장, 나쁜 친구, 나쁜 애인, 나쁜, 나쁜, 나쁜.......그들은 빈집털이처럼 나의 이해와 관용, 존경심, 자존감들을 전부 훔쳐갔다. 슬플 때 다그치고 기쁠 때 깎아내리는 식으로 왜곡된 나의 현실인식을 한번 더 비틀었다. 나는 그들과의 마찰이 당황스러워 계속 반성하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생각이 짧았다"는 말을 그렇게나 많이 하는데도 과열되는 내 잘못들을 믿기 힘들었다.
너무나 유감스러운 사건들 덕분에 거지 같은 인생개혁프로젝트를 한 큐에 끝낼 수는 있었다. 나와 별개로 각기 추악한 인간군상들을 보며, 악인들에겐 잘 해봤자라는 통찰을 얻은 것이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렸다. 당시엔 못 견디겠다는 생각으로만 버텨지는 1분 1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매 순간 억울했고, 남이 만든 악몽에 사로잡힌 내 처지가 엿 같았다. 그래도 길몽과 악몽을 두루 탐닉하며 몽상의 양면적 속성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생각들은 환상이라는 인지가 확실하지만, 나쁜 생각은 정반대라는 거였다. 악몽들은 ‘언젠간 끝날 것’이란 감각을 마비시키며 지독한 현실감을 흉내냈다.
하지만 불굴의 ADHD 용사는 절망을 오래 갖고 놀 수 없는 법이었다. 당시엔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은희경, 『새의 선물』)>는 구절에 큰 위로를 받았다.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타인의 악의에 악의로만 맞서고 싶은 격정을 타이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내가 매일 하는 생각의 주체는 ‘저 사람’, 즉 남이었다. 하지만 ‘삶이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저 사람을 보냈을까?’ 생각하면 주인공은 다시 내가 되었다. 내 인생의 조연들이 오로지 장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삶이 하는 말들을 빨리 알아듣고 싶어졌다. 한 번에 못 알아들으면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될까 두려웠다. 삶은 지루하고 압도적인 호랑이 선생님이니까, 내가 훌륭해질 때까지 불행을 가장한 가르침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삶의 속내를 짐작하는 과정에서, 복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진실로 하고 싶은 복수들은 죄다 범법이어서 이룰 수 없었고, 이루지 않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타인을 죽이지 않으며 제거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내 생각엔 그저 잊는 것 뿐이었다. 망각을 용서의 개념으로 두면 해주기 싫기 때문에 두 가지를 분리했다.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면서 다 잊었다.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기에 더 열심히 잊어버렸다. ADHD는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잘 잊기 때문에 잊고 싶은 것 쯤이야 우습게 잊을 수 있다고 믿었다. ADHD 기질 덕에 많은 붓기와 콧물과 티슈 낭비를 예방할 수 있었으니 약간의 덕을 본 셈이다.
최후의 내가 천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난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잊었다 생각한 것들에 불시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혹은 “생각할수록 열 받아.” 연쇄적 데굴데굴 분노로, 여름에도 냉동고에 갇힌 듯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땐 내 삶보다 내게 상처준 사람들의 삶을 믿었다. 그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망쳐나갈 세월과 사건들을 기대했다. 망하라고 생각하고 망하는데 힘을 보태지는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게서 200ml 이상의 눈물을 짜낸 사람들이 장수하길 바란다. 그런 인간성으로 오래 사는 게 과연 축복일까 싶은 것이다.
몇 번의 자아 폭발을 겪은 후, 푸른 장미나 샤인머스캣이 되자는 다짐은 완전히 박살나게 되었다. 꽃이나 포도를 설계하는 것처럼 나를 고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작 같은 방식으로 수정될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 때문에 획기적으로 좆되었던 나는 이제 인생 개혁에 목 매지 않는다. 어쩌면 삶이 내게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 아닐까 싶다. 길길이 뛰거나 실실 웃거나, 빌빌거리며 낭비한 순간들이 결국 하나의 결론을 조명한다.
아름답지 못한 특징들이 전부 죄인 것은 아니라고, 죄인처럼 살고 싶을 때마다 죄의식과 싸우라고. 자신을 버리게 만드는 타인들을 버려야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정지음 작가
👉 1992년 출생. 26세에 ADHD 진단을 받았다. 내외부적 좌충우돌 끝에 질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젊은 ADHD의 슬픔』으로 8회 브런치북 대상을 받았다. 스타트업 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코미디 드라마 『언러키 스타트업』 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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