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열일곱 무렵부터 바로 요 며칠 전까지 나도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를 도통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상상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추진력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생체 엔진 같은 것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도 특별할 가능성이 높고, 주위 사람들도 내 덕분에 조금은 특별해진다. 특별함이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막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유전이나, 건물의 터를 다지기 위해 땅을 고르다가 터지는 온천 같은 것이다. 발굴되는 것이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묘사하자면 대략 ‘특별함’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함이야말로 흉내낼 수 없는 오리지널리티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말은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의 보험 가입 약관 같은 것이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대중 종교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교회에서 유대의 관습을 몰아내 인종, 민족과 상관없이 누구나 기독교인 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목숨을 바치거나, 그다지 큰 깨달음이 없어도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권 없이도 얼마든지 출입 가능한 나라와도 같다. 그래서 혁명적이다.

그러나 나의 특별함은 너무나 특별해서 평범한 사람들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을 뿐더러, 가까이 다가온들 이해하기도 어렵다. 나의 특별함에 접촉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특별함만을 사무치게 깨닫게 되므로, 나의 특별함은 그들에게 얼마든지 위협적일 수 있다. 대략, 내가 나의 특별함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 내가 나의 특별함에 대해 묘사하자고 드니까 문장이 막힘이 없고, 생각에 왜곡이 없다. 그것은 시속 170km 직구를 가진 강속구 투수와 같은 것이어서 굳이 공의 궤적을 구부려 타자를 유혹하는 따위의 전략이나 기술이 필요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 스스로를 과대 평가 위에 올려놓고 살아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평범한데 좀 특이한 사람이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 특별해지기는 사실 쉽지 않고, 고작 특이하거나, 잘못하면 괴팍한 사람 따위가 되기 쉽다. 스스로 특별하다는 사실로부터 놓여나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특별하지 못한데 어떻게든 특별하고 싶은 사람들의 플랜B 같은 것이므로 연민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삶은 그냥 평범하다. 요철이 없다. 밋밋하다. 하지만 평범함하다는 사실이 그 존재를 깎아내리거나, 도외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끔 특별함에 이르지는 못하고, 어줍잖은 특이함에 머물러 있음에도 평범을 폄훼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누군가를 특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별로 사업하는 L00 씨를 가리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해다.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주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깍아내리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그냥 체감상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기분이라는 뜻일 뿐.
사실 평범함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누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왔기에 자신을 얼마든지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우리는 누구나 그 과정이 평범치 않았다고 해서 결과가 비범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도, 대개는 곧 깨닫는다. 아무리 특별한 물건일지라도 당근 마켓에 중고로 팔리는 날이 온다.
나름대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몰이해와 부조리와 싸우면서 성장해 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으로 비범하고 남다른 사람이 되느냐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아니 대부분 그렇지 않다. 평범함 즉, 사람의 관성은 생명유지 장치 같은 것이어서, 특별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보다는 살아 남아 평범한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런 사람들이 더 건강하다.
퐁당 역시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퐁당원 여러분,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원고를 주세요. 어서 빨리 나우 당장.
에디터 김선형 👉 온오프라인 콘텐츠를 만든다. 마감을 어기는 게으른 필자들을 오백 만 원 이하, 2년 이하 징역에 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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